대상이 ‘여기’를 떠나 초월적인 ‘저곳’에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과 그가 사는 ‘여기’에 설정되고 있다. 한용운은 “섞이지 않는다는(不混) 초월보다도 진세(塵世)를 멀리하지 않는다는 내재(內在)를 통해서 대승의 보살 정신을 더욱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재화는 ‘지금 여기’에서 초월을 따로 설정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세계관으로 볼 때 이미 이곳이 초월이 이루어진 곳, 즉 지금 이곳이 ‘너머-여기(beyond-here)’라는 것이며, 인간관으로 볼 때 현재의 인간 존재가 이미 초월된 존재라는 의미이다. ‘너머-여기’에서 ‘여기’는 ‘너머(beyond)’의 대상이 아니라, ‘너머’를 통해 도달한 목표이자 결과일 뿐이다. ‘여기’를 넘어서서 따로 존재하는 ‘저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너머’의 단계를 거쳐 도달한 곳이 바로 ‘여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를 넘어서 따로 존재하는 어떤 세계를 구성할 필요가 없으며, 나를 넘어서 있는 어떤 초월적 존재를 설정할 필요가 없다. 세계의 모든 것은 이런 상태의 ‘너머-무엇(beyond-something)’일 뿐이다. 세계는 이미 ‘너머-여기’이며, 우리는 이미 ‘너머-나’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 서면 우리가 넘어서야 할 것은 ‘여기’로서의 지상이나 ‘나’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별세계로서의 천상의 설정 자체이며 초월, 넘어섬이라는 관념 자체가 된다. 한용운은 ‘너머-여기’의 사유로서, 현실을 초월한 곳에 ‘저기’를 설정하는 ‘너머-저기’의 벤야민의 사유와 변별점을 지닌다.
박현수, <전통시학의 새로운 탄생: '너머-여기' 사유의 시학적 전개>, 경북대학교출판부, 2013.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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