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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학십도차〉를 필사하다

〈진성학십도차〉를 필사하다 박현수 일흔이 다 된 이황이 열일곱의 임금을 위해 올린 글을 붓글씨로 필사한다 ‘판중추부사 신臣 이황은 삼가 두 번 절하고 아뢰옵니다’ 서툰 붓글씨로 원문을 짚으며 써가니 처음엔 그저 낡은 날 남의 글일 뿐 한자가 낯익고 문리가 트이자 어느새 나는 흔들리는 등불 아래 떨리는 손으로 글을 쓰는 늙은 학자가 된다 필사는 겹문이 중중한 고졸한 집 어디로 들어설지 기필하기 어렵다 ‘때로는 극히 괴롭고 유쾌하지 못한 병통이 있기는 하나 이것이 곧 옛사람들이 말한 바 장차 크게 나아가려는 기미요 또한 좋은 소식이 올 단서이니 절대로 이 때문에 스스로 멈추지 말고 더욱 자신을 가지고 힘쓰옵소서’ 아홉 번을 넘어서고 보니 어느새 제 자식에게 편지를 쓰는 늙은 가장이다 군주와 ..

<엠마오 가는 길>

엠마오 가는 길 - 해월시편 1 박현수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날 일이라 하니라엠마오로 가는 제자 두 사람과 길을 가며 말을 나누어도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예수께서 이르시되너희가 주고받는 말이 무엇이냐 하건대나사렛 예수의 이야기라 하더라곁에 선 이가 한울님인지 알지 못하는눈 가린 사람이 어찌 이들뿐이랴내 일찍이 집에 손님이 오거든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한울님이 강림하셨다 말하라 하였으니 이 어찌 빈말이겠는가지금 나와 함께 길을 걷는 이도그저 곁을 지나는 저 이도 모두 한울님이요길가 실버들 가지에지저귀는 새조차 한울님 아님이 없나니바로 오늘이예수께서 부활하시어그대들과 동행하는 날이라 생각함이 어떠하뇨 - , 2026.05.

<표해록을 읽는 밤>

표해록을 읽는 밤 -문순득의 「표해시말漂海始末」 박현수 풍랑이 삼켰다 다시 뱉어낸 것은낡은 해도海圖만이 아니었다 흑산도 유배지에서 정약전이 받아 적은 것은세 해 동안 지워진흑산도 홍어 장사꾼의 행로가 아니라길을 에워싸고 있던 생생한 삶의 구도였다 강진에서 아우 정약용이흔들리는 등잔불 아래 무릎을 치며 읽던 것은등 푸른 생선처럼행간을 넘어 흐르던 화폐의 풍요로운 길이었다 여행은 풍경을 확인하는 여정이 아니라누군가의 암시를 꿈처럼 먼저 짚는 일이다 - , 2026.06.상반기

카테고리 없음 2026.04.29

<영원에 대하여>

영원에 대하여 박현수 수운(水雲)은영세(永世)라는 말에다‘한 사람의 평생’이라는 풀이를 달았다지상의 삶이,한 사람의 경험 전체가영세이고 영원이고 무한이라는 말씀우리가 아는 영원이란이 평생의 앞뒤를 억지로 늘려 만든 괴이한 말이란 말씀영세불망(永世不忘)도 만사지(萬事知)도 이 지상, 한평생의 일일 뿐이라고인간의 일생을이토록 환하게 다시 빚어낸 말씀여기를 넘어 넘어 어딘지도 모를 저기를 찾아 헤매던초월의 그 자리가바로 밥 뜸 들이는 냄새 나는 여기란 말씀 이 찬란한, 흙 묻은 영원! -, 2025 겨울호.

<구름의 하체>

구름의 하체 박현수 구름은 하체가 없다지상을 디딜 발이 없으니‘바지를 입은 구름’ 따윈 애초에 없다하체가 없다고 뭉게뭉게 욕정이 걷힐 리 없다그래서 삶이 가벼워졌을 리 없다구름 속에서 새어 나오는 금속성 빛과 소란 구름이 양서류일 리 없다저 평평한 배에서올챙이처럼 발이 생길 수 없다지상을 걸어 다니다저 푸른 허공에 풍덩 뛰어들 수도 없다영원히 중간계를 떠도는 영혼빗방울, 구름의 사리지상은 그저 구름의 적멸보궁일 뿐 반운반인(半雲半人)을 명상하다나는 이번 생애를 너무 많이 허비하였다 - , 2025.가을호.

<교정 직원 K>

교정 직원 K 박현수 교정이라는 건정말 이상한 글 읽기예요글 속에 완전히 빠져들어서도 안 되고글 바깥에 완전히 나와 있어도 안 돼요어중간하게 살아온 나와 너무 닮았어요연애도 그랬지요남자를 교정 텍스트처럼 읽었으니까요몰입도 아니고 외면도 아닌이상한 읽기가 잘 될 리가 있겠어요?내용을 견제하면서저자와 대결하고 있었지요가끔 피의자 진술을 듣는 경찰관 같기도 해요이야기를 듣다 보면돼지꼬리표 같은 교정 부호가 문득 떠오르지요한 달에 책을 몇 권씩 읽지만독서 목록에 넣지 못하는 것처럼내 연애도 그런 것이었어요교정이란 것도 글 읽기일 수 있을까요그렇다면 내 어중간한 삶도 삶일 수 있겠지요 - 창간호, 2023.03.

<배들평야>

배들평야 -전봉준의 땅 박현수 전봇대가 포승줄에 묶인 죄수들처럼줄을 서서 들판을 건너고 있다배가 들어온 들판인지배나무가 있는 들판인지 이름이 흐려지듯이맨 앞에 선 최초의 사람은 희미하다그는 아득한 평야를 다 건너갔으리라이 가난의 땅을 기어코 가로질렀으리라뒤따르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생각한다묶인 채로, 묶인 채로맨 앞에 선 사람의 격정에 찬 목청을 듣고푸른 대나무처럼 솟아오른 그의 의지를 본다그 마음을 그려보던 마음들이어느새 그 마음이 되어 줄줄이 따라 나선다전류가 전봇대를 건너듯이 사람들을 건너가는 전율이 번쩍인다만석보가 배들평야에만 있는 건 아니지만따라나선 마음들은 여기에만 있다는 듯전봇대가 아득한 평야를 건너듯이묶인 채로, 묶인 채로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막..